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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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27)
2014년 03월 29일 13시 00분  조회:2843  추천:1  작성자: 김송죽
 

27.

김좌진은 본래부터 만우난회(萬牛難回)라 할만치 주견이 센 사람이다. 그러나 그도 자기가 하는 일이 일단 틀린다는 것을 깨닫기만하면 가차없이 잘못을 승인하고 일각의 유예도 없이 그것을 고칠줄을 아는 허심한 사람이기도했다.

신민부는 자체내부의 모순으로 하여 량파분렬과 대립이 생겼고 또 그로 인하여 한창 발전도중에 갑작스레 혼란해지면서 전반사업기능은 마비되여버린것이니 결국에는 자기가 세운 강령은 하나하나 빛좋은 공중루각으로 되고말았다. 그 결과 일반동포들의 믿음을 점차 잃고 있었다. 현존기구를 그냥두고서는 관할내의 동포들을 응집력있게 자기 주위에 묶어세우기 어려웠다. 게다가 혁신의회가 해체되여버렸고 그처럼 희망해오던 유일당건설도 실패하고말았다. 그렇다고 동포들을 무조직상태에다 내버려둘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좌진은 합당한 해결책을 어서찾아 이 곤경에 빠진 국면을 타개하려했다.

김좌진은 자기 진영의 중진들인 정신, 황학수 등 몇사람과 여러날을 두고 거듭 연구한 끝에 드디여 원 신민부의 중앙집권제를 그만두고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며 자유합의를 제창하는 무정부주의리념을 수용하여 새로운 정권기구를 세워보는것이 좋겠다는 것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신민부지도층에서 아직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정부주의리념에 대해서 생소했고 또 그자들의 리념으로 자체의 조직을 개조하는것을 선뜻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일을 끌게 되었다. 한편 북만주에 있는 17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1927년 7월에 중동로를 근거지로 삼고 활동해볼 목적으로 해림조선소학교에서 모임을 가져 자체의 조직인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 조직의 주요인물은 김종진과 리을규였다.

 

지난해의 9월에 조선에서 김종진의 부인 홍씨가 장녀 동한(東漢)이를 데리고 수천리밖의 북만주로 문득 찾아왔다. 그래서 김종진은 해림에서 세간을 갖추어 살다가 가정을 신안진으로 옮기고는 그곳에서 장남 성한(成漢)이를 보았다. 아이는 영특하고 귀하였는데 만주에서 난 아이라하여 이를 기념코저 애명을 만주리(滿洲里)라 지었다.

김좌진은 재종제가 가정을 신안진으로 옮겨가는것을 보자 여지껏 그의 집에 거접해있던 리을규를 산시로 불러다 자기와 가까이있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김종진은 사흘이 멀다하게 산시로 오군했다. 그래서 김좌진은 그네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물론 이건은 그가 무정부주의에 대한 리해를 한층 더 깊이하는 과정이였다.

김좌진은 점점 무정부주의자련맹의 강령실질을 깊이 파악하게 되는 한편 그네들과 이신동체(二身同體)가 된다해도 앞으로 혼란이나 마찰이 없이 일치 협력할수 있겠다는 것으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8월에 석하(石河)의 동포농민의 집에서 신민부의 중견들은 간부회의를 열고 여러날 토론을 한 끝에 마침내 자신들이 추구하고있었던 리념인 대종교적민족주의를 일단 보류하고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의 무정부주의리념을 수용하고 그 전원까지 참가시켜 신민부를 한족총련합회로 개편하게 되었다.

이로써 다년간의 투쟁사를 가진 신민부는 자기의 력사적인 사명을 끝마치고 해체됨과 동시에 새 조직의 탄생을 보게되였다.

 

                      韓族總聯合會의 組織大綱

 

1. 본련합회의 목적과 사업

   본련합회는 재만한교의 정치적,문화적, 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며 동     시에 항일구국의 완수를 위하여 재만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교포들의 자     기자치적 협동조직체임.

2. 본련합회는 본회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좌의 사업을 행한다.

  (ㄱ) 교포들의 집체정착사업, 교포의 유랑방지, 집단부락촉성.

  (ㄴ) 영농지도와 개량,공동판매, 공동구입, 경제적상조금고설치 등을 목적하는 협동조합사업.

  (ㄷ) 교육, 문화사업. 즉 소학, 중학의 설립운영. 각지조직의 련락 및 교포들의 소식. 교포들의 생활개선. 농업기술지도 등을 위한 정기간행물간행. 순회광좌, 순회문고설치, 성인교육과 장학제도.

  (ㄹ) 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군사훈련.

  (ㅁ) 중학출신자로서 군사간부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의 설립운영.

  (ㅂ) 항일게릴라부대의 교육훈련, 계획지도를 받으며 지방치안을 위한 지방조직체의 치안대의 편성 지도 등을 위한 통솔부설치.

3. 의사기관과 집행부

   각부락자치반은 반민총회를 결의기관으로 하여 사업계획, 예결산의 심의 및 책임자와 대표자의 선거를 행하며 구분회에는 각 반대표자회의, 지역련합회에는 구분회대표자회의, 총련합회에는 지역대표자 및 구분회대표자회의, 총련회에는 지역대표자 및 구분회대표자총회를 결의기관으로 하여 사업계획, 예결산의 심의결정 및 각 조직과의 련계사항의 심의, 각부서책임자의 선거를 행한다.

   집행부의 부서는 총련합회에 위원장, 부위원장, 농무, 교육, 군사, 재정, 조직선전, 사회보건, 청년, 총무의 각 부를 설치하고 각부에는 부위원장과 차장을 둔다. 섭외는 총무부가 맡는다.

   각 지역련합회이하의 조직의 집행부서는 총련합회의 부서에 준하여 그 지방실정에 맞도록 적당하게 둘 것.

 

이상은 한족총련합회의 조직강령이였다. 그런데 이 강령대로 조직을 내오자고보니 현실의 정황으로서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즉 령도성원 선발은 마땅히 아래로부터 우로 올라와야 했지만 동포들의 실정이나 신민부의 잔존한 조직실태가 실행키 어려운 형편이였다. 그래서 부득이 우선 총련합회의 임원을 임명해놓고 각 조직에 합리적인 선거를 단행하여 다시금 조정하기로 했으니 그 임원은 아래와 같았다.

 

총 련 합 회 위 원 장: 김좌진

부    위    원    장: 권화산

농 무 및 조 직 선 전: 김종진

교                육: 리을규

군                사: 리붕해

부     위    원   장: 한청암, 정  신, 박경부, 강석천.

부        차      장: 리  달, 김야봉, 김야운, 리덕재.

 

한족총련합회는 이상과 같이 본부의 임원(任員)들을 결정해놓은 후 조직선전부를 중심으로 한 대원들을 지방에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방조직을 책임질수있는 적임자를 물색케했다.

조직선전부는 모두 3개패로 편성되였는데 맡은것을 보면 해림을 중심으로해서 제1대는 서쪽으로 일면파까지, 제2대는 동쪽으로 오참(五站)까지. 제3패는 길림성에서 돈화까지의 연선이였다.

 

호수에 돌을 던져 그 깊이를 알아보자는 심정이랄가, 김좌진은 조직선전대를 보내놓고나서 은근히 조여드는 가슴으로 반영을 기다렸다. 왜 그렇지 않으랴, 여러사람들이 반대했음에도 곧장 주장해서 그네들을 설복해가며 세운 조직이였다. 그러니만큼 처음부터 무탈하게 뜻대로되여야지 그렇게 되지 않을 시에는 남의 비웃음을 받을것이다. 아니, 비웃음이 무서운것이 아니라 이 집단의 완전붕괴가 무서웠던 것이다. 그는 제발 뜻대로 되어주기를 기도했다.

만주에서 살고있는 조선동포들을 모두 하나의 강대한 자치집단으로 묶어세워 포악한 지주와 맛서고 안거락업을 하면서 항일구국을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백야장군은 자기의 이러한 념원이 무탈하게 이루어지기를 한번다시 빌었다. 헌데 사물이란 언제나 정반(正反)량면이 있는 법, 광명이 있는데는 암흑이 있고 선진이 있는데는 락후가 있듯이 적극적이고 선량한 그의 욕망을 대하여 소극적이고 악한것이 뒤따르고있었다.

 

한편 동북당국의 도발로일어났던 <<중동로사건>>은 쏘련측의 승리로 결속짓고말았다. 10월 12일, 삼강구(三江口)전투가 있은후 쏘련군은 동강, 부금, 만주리, 해라얼 등 여러곳을 점령해버렸다. 동북군벌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해서 11월 31일 국민당정부는 부득불 쏘련에 향해 강화를 제기한수밖에 없어서 12월 22일 량국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10조의 협약을 맺고 중동로는 원상태로 다시금 회복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쏘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조공만주총국(엠엘파)의 부분적조직들은 적의 손에 파괴되였고 내부모순이 생기면서 파벌싸움이 한층 격화되였다. 그리하여 국제공산당은 9월초의 <<6차대회>>에서 이 종파집단을 해산하라고 지시했다.

어떤 사람들은 <<중동로사건>>시에 독립군의 민족주의자들은 까딱 움직이지 않고 보고만있었으니 철두철미한 기회주의자라 비난하면서 지어는 진정한 혁명자가 옳으냐 아니냐 하고 떠들며 다닌다는 반영이 들어왔다.

<<미친녀석들! 이젠 남까지 물어뜯을판인가.>>

김좌진은 한마디 내뱉곤 어처구니없어 웃고말았다. 어쨌든 동족이고 항일구국을 하자는 마음만은 동일하니 공동한 감정만 갖는다면 호상반목은 해소되고 격화되였던 모순일지라도 완화될 때가 있으리라는 너그럽고 좋은 생각을 다시한번 가지면서 그는 새정부건설에 진력했다. 9월 3일, 한족총련합회는 본부를 산시에 두었다. 한족총련합회의 조직선전대가 떠나간지 얼마간 지나서부터 도처에서 이 새로운 조직을 환영한다는 희소식이 련달아 날아들었다. 그래서 백야 김좌진은 기뻤다.

조직선전대원들은 계획대로 맡은바의 사업들을 착실하게 해나갔다. 그들은 새로발족한 한족총련합회는 과거의 모든 단체처럼 권력과 위세로 동포여러분들을 지배하는것이 아니라 동포농민들 자체가 곧 주인이 되어 힘을 모아서 꾸려나가는 자체기관이라는 것, 일체는 동포농민 모두의 리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활약하는 자기의 조직이라는 것, 이를테면 중국지주나 관청과 교섭할 일이 있으면 대변해서 처리해준다는 것 등등 조직대강내용을 해석해서 듣는이들로 하여금 모두가 이 조직이 참으로 자기의 조직이 옳음을 깨닫고 옹호하게끔했다.

그래서 전해오는것은 기쁜 소식인데 지어는 권념도 없었건만 산재해있던 농호들은 이같이 좋은 조직이 어디에 또 있겠느냐 하면서 큰부락을 찾아서 모이려한다고 했다. 김장군은 듣고서 정녕 그렇게만 되어준다면 뜻대로 조선인의 집단부락을 만들어서 실력양성의 기반을 튼튼히 닦을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은근히 죄여들던 가슴이 차츰 풀리였다. 아닌게아니라 이론(異論)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색다른 주의자들과 결탁해서 력사있는 신민부를 고집스레 해산해버렸는데 바라는대로 안된다면야 무슨 꼴이 되겠는가.

<<동심협력하니 일이 이같이 풀려나가는구려!>>

백야는 김종진과 리을규를 보면서 웃음을 날렸다.

사실 이 두 무정부주의자는 이번 신민부재편성에 역할이 컸고 지금은 또한 일심량역으로 일을 떠밀고있었다.

그런데 한족총련합회의 발자욱이 이같이 잘 떼여지고있으니 이에 따라서 못믿어워하면서 빈정대는 패들도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그럴수도있어. 되고 안되는건 이제 두고보라지.>>

그러나 각지에서 조직선전사업이 그 이상 큰 장애는 없이 계속 진행되여감을 보고 백야는 제2의 보취로서 인재난을 해결코저 북만중학기성을 시급히 서둘렀다.

지금 각지에 대소부동의 소학교가 53개소나 있지만 중학은 아직 하나도 없었다. 이제는 중학교도 몇 개 창설해야한다. 이 일을 시급히 서두르게 되는 원인은 다름아니라 이제 각지에 한족총련합회(韓族總聯合會)의 산하조직들이 세워지면 동일한 정신으로 활약하게 될 사업일군을 이 중학교에서 배양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중학은 간부속성훈련소로 우선 되어야 한다. 김좌진은 이 일을 한족총련합회의 교육부장인 리을규에게 맡기고 김종진이 그를 적극협조해주도록했다. 말하자면 교육건설사업을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맡겨버린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업하자니 간부들의 반대의견에 봉착했노라고 반영했다. 종합해보면 한족총련합회가 발족한 직후여서 허다한 기초적인 준비사업들이 많고 많은데 학교세우는 일부터 착수하면 일의 선후를 모르는게 아니냐, 지금의 형편에서 중학을 세운다해도 누가 자녀를 보내겠느냐, 그 많은 학교기지와 실습지들은 갑자기 어디서 구하는가, 막상 땅이있다해도 재정이 곤난한데 어떻게 구입하거나 임대하는가, 교원은 또 어디서 모집해오는가 하는 등등이였다. 그래 어떻게 하였느냐 물으니 두사람이 하는 말인즉 처음은 그렇게 반대의견이 있어었으나 지금은 찬성한다는 것이였다. 그들은 학교기지는 적당한 지점을 찾고 지주와 교섭해 임대하면 현금이 없어도 되고 교사는 토피(土皮)를 쳐서 지을수도 있으니 로력만 동원하면 될것이고 교원은 국내외의 젊은 동지들중에서 물색하면 얼마든지 될게 아니냐, 지금의 실력으로는 많은 수의 학생을 받아들일 설비를 갖출 형편이 못되니 먼저 몇 개만 세워 자급운영케 한다면 오자는 학생은 필연코 많을것이니 하등의 걱정할것 없다고 했다는거다.

백야는 그들의 림기응변같은 민첩하고도 명철한 수완에 감탄하면서 잘했노라 칭찬을 했다.

중학기성회(中學期成會)는 부지런히 서둘러 석두하자와 산시중간의 고령자(高領子)에 있는 1,000여무 되는 땅을 학교기지로 예정했다.

이제 남은 일은 땅임자인 길림의 지주와 임대차계약을 맺는 일이였다. 그래서 김종진이 나섰는데 세 번이나 교섭하러 갔어도 번번이 되지 않아 되돌아오군했다. 길림의 지주는 조선사람은 신용이 없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땅을 내놓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실 그것은 교활하고도 가혹한 그자가 차지료(借地料)를 높이자는 수작이였다.

중국지주들의 상투적인 수작이 그러함을 잘 아는 백야장군은 어느날 교육부장인 리을규까지 데리고 자기가 직접나섰다. 그제야 길림의 지주는 중조호린(中朝好隣)이라느니 민족우의라느니 하면서 고령자의 그 1,000무의 땅을 학교기지로 쓰기로 결약하고 차지료는 교지가 확정된 다음 다시 적당히 결약하자고 했다.

북만주에 들어와서는 조선동포가 제일 많이 모여살고있는 여기 해림을 중심으로하는 중동로일대와 독립군세력이 미치는 기타의 지방들에서 중국상인들이 동포농민들이 일년간 피땀흘리여 지은 수만석의 알곡을 헐값으로 수탈하는것을 막기 위해서 한족총련합회는 공판제(共販制)를 실시하였던바 간부들이 위탁판매자로 나서서 적극 활약했다.

한편 김좌진은 친히 산시에다 정미소를 세우는 일에 돌아쳤다. 정미소가 있어야했다. 정미소를 세우면 부근에 사는 농민들의 편리와 리익을 도모하고 기관의 자금난도 일정하게 해결할수 있었던 것이다.

백야는 산시마을 동쪽구역에 있는 자기의 저택가 공지에다 정미소를 짓게했다.

건축대가 곧 서둘렀다. 그래서 얼마안되여 과연 그의 집 동켠에 저택과 이어붙어서 남북방향으로 커다란 정미소가 일떠서게 된 것이다. 고정작업인원은 4명.

한족총련합회가 이같이 학교를 세우고 정미소까지 세우니 소문이 사방으로 빨리퍼져 각지에서 주민들이 축하대표를 보내거나 격려의 편지가 날아왔으며 류랑하는 품팔이군은 물론 산재한 농호들이 어서빨리 큰 마을로 모여들자는 욕망과 움직임이 보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응당이면 그러지를 말아야 했고 얼마든지 피면할수도 있었을 한가지 상서롭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한족련합회가 성립된지 이제 겨우 두달밖에 안되는 10월초의 어느날, 신안진에서 김종진이 자기를 찾아와 독립군과의 타협을 청하는 사람을 구축했던 것이다. 일의 경과는 이러했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했던 김남천(金南天)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그보고 자기들은 이제부터 이전의 반목을 해소해버리고 한족총련합회와 손잡고 가깝게 지내기를 바라니 용의를 받아달라고 했다. 그런것을 김종진은 김장군에게는 물론, 다른 간부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제 혼자 사사의 감정에 사로잡혀 공산주의는 인간도리에 위반된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면서 그더러 공산주의부터 청산하라느니 인간본래의 자태로 돌아오라느니 해서 대방을 격노케 만들었다. 일은 잘못번저져서 며칠후에 어느 부농집마당에서 량자간에는 격렬한 공개변론까지 벌어졌다. 그 결과 선의를 품고 찾아왔던 저쪽은 뼈에 사무칠지경의 적의만 품고 돌아가고말았다. 이쪽에서는 주먹들고 구호까지 웨쳐대면서 그네들을 쫓아버리고는 승리했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악과보응(惡果報應)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 스스로 면치못할 우환을 만들어놓았음을 어찌 알았으랴. 만약 이 일을 처음부터 김좌진이 알았더면 어떻게 대했겠는가?

이일이 있은지 얼마안되여 공산당이 작당해서 습격하리라는지 로씨야에서 암살대가 넘어오리라는지 온갖의 풍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함께 김좌진은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과 경찰부장 마쯔모도(松本 또는 松島라고도 함)와 결탁하였다느니, 중동철도연선에서 공산당인들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조선인공산주의운동을 파괴한다느니, 마쯔모도는 김좌진에게 활동자금을 대여주었다느니, 김좌진은 그 돈으로 산시에 정미소를 차리였고 제 친구의 녀편네를 빼앗아 타락한 생활을 하고있다느니 하는 가지가지 험악한 요언이 나돌았다.

이에 대처해 한족총련합회에서는 내부인원들에게 경각성을 높이라했다. 그리고 림시정부의 <<독립신문>>은 아래와 같은 글을 실어 대중에게 알리였다.

 

                            金佐鎭씨의 活動

 

敵紙 大板朝日新聞級  長春實業新聞에 大韓獨立軍團總司令 金佐鎭씨가 哈爾賓 敵領事館에 歸順하였다는 說을 記載하였으나 此는 全然無根함이요. 敵은 우리 事業을 妨害키 위하여 反間策을 弄함인것인즉 此에 속을 리가 없으려니와 氏는 오직 實力을 養成키 위하여 今年度부터 吉林省 某地方에 屯田制를 大規模로 實行하기로하고 一方으로는 士官養成所를 設立하야 現今 百餘名의 士官을 敎授하는 中이라더라.

 

형세가 이같이 험악해가건만도 김좌진은 일신의 안전은 제쳐놓고 조직공작대의 보고를 받을라니 상의하여 새 지시를 내릴라니 벌려놓은 공사를 진척시킬라니.... 그야말로 침식마저 잃어가면서 눈코 뜰 새없이 돌아쳤다.

이때는 그 혼자만  바삐 보낸것이 아니라 한족총련합회의 간부 전체가 조직건설을 하느라고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악전고투를 했다.

이러는중에 어느덧 1930년이 돌아왔다. 분투로써 실천을 기약하는 새해였다.

백야 김좌진장군은 동지들과 함께 신안진에 가서 재종제 김종진의 집에서 성공을 빌면서 축배를 들었다.

그런데 어찌알았으랴, 기대와 희망속에서 축복을 빌며 맞이한 이 새해의 벽두에 액운이 떨어질줄을!

1930년 1월 24일(단기 4263년) 오전 7시경. 예고랄가, 김장군은 아침진지를 들다가 수저가 홀연 뚝 부러졌다. 과연 기분잡치는 괴사였다.

이일이 있은후 정미소에서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 발동기는 할빈에서 사온것인데 아직 제대로 부릴만한 기술자가 없어서 고장나면 장군이 손수 고치고 운전도했다. 그런것이 돌아가다니!

김장군은 정미소에 가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서향의 정미소 널대문을 열려는 순간 <<땅!>> 하고 음지에서 괴한이 쏜 권총탄알이 그의 몸으로 날아왔다.

<<어느놈이 이래?>>

가슴을 맞은 김좌진은 돌아다보고 한마디 더 했다.

<<이 철부지같은 놈! 네가 역적이였구나!>>

<<땅!>>

반역자의 저주로운 탄알이 다시날아와 그를 쓰러뜨렸다.

만주독립운동의 대들보는 이렇게 부러지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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